장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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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란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약한 프랑스의 군인으로, 프랑스 제1제정 시대의 제국 원수였다. 1769년 프랑스 렉투르에서 태어난 란은 혁명 이후 군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내며 이탈리아, 이집트, 스페인 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몽테벨로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아우스터리츠, 예나-아우어슈테트, 프리틀란트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나폴레옹은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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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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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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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 란 |
작위 | 몬테벨로 공작 시에비에시 공작 |
별명 | 이탈리아군의 롤랑 대육군의 롤랑 대육군의 아킬레우스 |
출생과 사망 | |
출생 | 1769년 4월 10일, 프랑스 왕국, 기옌-가스코뉴, 렉투르 |
사망 | 1809년 5월 31일 (40세), 오스트리아 제국, 니더외스터라이히주, 에버스도르프 |
매장지 | 파리 팡테옹 |
군 복무 정보 | |
소속 |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
군대 |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792년 – 1809년 |
최종 계급 | 제국 원수 |
주요 참전 | 프랑스 혁명 전쟁 로아노 전투 제2차 데고 전투 바사노 전투 아르콜레 전투 아부키르 전투 몬테벨로 전투 마렝고 전투 나폴레옹 전쟁 아우스터리츠 전투 잘펠트 전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투델라 전투 제2차 사라고사 공방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
훈장 |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 철왕관 훈장 사령관 |
작위 | 제국 공작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폴레트 메리크 (1795년 결혼, 1800년 이혼) 루이즈 앙투아네트 란, 몬테벨로 공작 부인 (1800년 결혼) |
자녀 | 귀스타브 올리비에 란 드 몬테벨로 (아들)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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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장 란은 1769년 4월 10일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 지방의 작은 도시 렉투르에서 태어났다.[2][4] 그의 아버지는 소지주이자 상인이었던 장네 랑(1733~1812)이었다. 랑은 10대 시절에 염색공에게 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2][4],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1792년 국민위병에 자원 입대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1. 교육 및 군 입대

장 란은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 지방의 작은 도시 렉투르[2][4]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2][4] 10대 시절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염색공에게 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했다.[2][4] 하지만 그는 뛰어난 체력을 지녔고 다양한 스포츠에 능숙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배짱과 꼼꼼함으로 고향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랑은 염색공 일을 그만두고 1792년 국민위병에 자원 입대했다. 같은 해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제르 자원 봉사 대대에 참여했다.[2][4] 당시 장교는 병사들의 상호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랑은 뛰어난 자질 덕분에 처음부터 보병 소위로 뽑혔고, 곧이어 대대의 중대장으로 선출되었다.[2][4]
그는 피레네조리앙탈 부대에 소속되어 스페인군과 싸웠다. 1793년과 1794년에는 피레네 산맥에서의 전투에서 장-앙투안 마르보 장군[5] 휘하에서 복무했다. 랑은 전투에서 비범한 용기와 부상이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력을 보여주며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탁월한 활약 덕분에 그는 ''여단장'' 계급으로 승진했다. 피레네 산맥에서 복무하는 동안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장군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며, 훗날 역시 육군 원수가 되는 루이-니콜라 다부로부터 승진 추천을 받기도 했다.[5]
3.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
장 란은 마구간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92년, 그는 국민위병에 자원하여 공화국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초기 복무는 피레네 산맥 동부 지역 부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그는 스페인과의 전투에 참여하며 첫 군사 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그의 군 경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 1. 이탈리아 원정 (1796-1797)
장 란은 바르텔레미 루이 조제프 셰레 장군 휘하에서 복무하며 로아노 전투에 참전했다.[5] 그러나 1795년, 테르미도르파의 군 개혁으로 계급에서 해임되었다. 군대야말로 자신의 길이라 믿었던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원정군(Armée d'Italie)에 단순한 자원병(일병)으로 다시 입대했다.1796년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한 그는 여기서도 두드러진 용기로 곧 중사로 승진했다. 그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나폴레옹은 전 소령 출신 중사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의 용기와 솔직한 성격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 계급으로 복귀시키고 고위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피에르 오제로 장군 사단에서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으며,[6] 나중에는 여러 차례 상설 선봉대의 3개 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7]

란은 이탈리아 전선의 모든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796년 4월 14일부터 4월 15일까지 벌어진 2차 데고 전투에서 큰 용맹을 떨쳐 나폴레옹의 주목을 받았으며, 전투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7] 바사노 전투에서는 직접 적의 군기 두 개를 빼앗는 전공을 세웠고,[7] 아르콜 전투에서는 항상 군대의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여러 차례(3번)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부대를 계속 지휘했다.[8] 그의 용기에 감동한 나폴레옹은 아르콜에서 노획한 군기를 메시지와 함께 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후 란은 클로드 빅토르-페랭(벨뤼노 공작) 휘하에서 교황령 침공에 참여했다.[8] 이때 소규모 정찰대를 이끌고 교황군 기병 300명과 마주쳤을 때,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부하들에게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려 교전을 피하기도 했다.[6][8]
3. 2. 이집트 원정 (1798-1799)
1798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이집트 원정에 동행하여 장-바티스트 클레베르 장군 휘하 여단의 지휘관으로 선발되었다.[9] 그는 이집트 카이로 함락 작전, 시리아 가자 포위전, 생장다르크 포위전 등에 참여하며 활약했다. 특히 시리아에서의 후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원정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싸워 명성을 높였다. 1799년 아부키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보나파르트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18 브뤼메르 쿠데타를 도왔다.[6]4. 나폴레옹 집권 시기
조아킴 뮈라 장군과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여단장은 예산 적자를 이유로 장 란을 축출하려고 음모를 꾸몄지만,[12] 오제로가 그를 구해냈다.[12] 이 일로 완전히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지만,[12] 1801년 포르투갈 대사로 파견되었다.[6][12]
1804년 프랑스 제1제정이 수립되자, 란은 나폴레옹이 임명한 최초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13] 같은 해 파리 근교의 17세기 메종 샤토를 매입하여 나폴레옹의 방문을 위해 국빈실을 재장식하기도 했다.
1805년에는 집정부 시절 잠시 잃었던 나폴레옹의 총애를 완전히 되찾았다.[13] [14]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1805년 10월 울름 전투에 참전했고,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Grande Armée|그랑다르메fra의 좌익을 지휘했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는 더욱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튀링겐 숲을 통과하는 행군, 자알펠트 전투(1806년 10월 10일), 예나 전투(1806년 10월 14일)에서 군단을 이끌었다. 1806년 12월 26일 폴란드 푸우투스크 전투와 1807년 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싸웠으며, 특히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선봉대를 지휘하며 큰 공을 세웠다.
1807년 나폴레옹은 시에비에르츠 공국(Duchy of Siewierz)을 재창설하고 프로이센으로부터 할양받은 영토를 란에게 하사했다.
1808년에는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독립 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지휘 능력을 시험받았다. 그는 11월 22일 투델라 전투에서 프란시스코 카스타뇨스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나폴레옹은 그를 몽테벨로 공작으로 임명했다. 1809년 1월에는 사라고사 포위전 지휘를 맡아, 치열한 시가전 끝에 2월 21일 도시를 함락시켰다. 스페인 원정의 참혹함을 겪은 후 "이 망할 보나파르트가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란은 다시 선봉대 지휘를 맡았다. 그는 에크뮐 전투와 빈으로 진격하는 과정의 여러 교전에 참여했다. 이후 다뉴브 강 도하 작전을 이끌었으며, 아스펜-에슬링 전투(5월 21일~22일)에서 앙드레 마세나 원수와 함께 프랑스군의 주력을 맡아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 중 포탄에 맞아 양쪽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4. 1. 제2차 이탈리아 원정 (1800)
보나파르트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라느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도왔다.[6] 쿠데타 이후 보나파르트가 제1집정관이 되자, 라느는 사단장 겸 집정관 근위대 사령관으로 승진했다.이후 이탈리아 원정군에 복귀하여 1800년 알프스 횡단에서 선봉대를 지휘했다.[10] 1800년 6월 9일에 벌어진 몬테벨로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10] 이 승리는 이후 마렝고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라느는 이 공적으로 훗날 몬테벨로 공작 작위를 받게 된다.[10] 이어지는 마렝고 전투에서도 라느는 큰 활약을 펼쳤는데,[11] 특히 열세에 놓인 전위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대군의 공세를 반나절 동안 막아내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중장으로 승진하며 단순한 용장을 넘어 유능한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입증했다.
5.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 가담했으며, 1800년 6월 9일 몬테벨로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마렝고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 이 공적으로 중장으로 승진하며 단순한 전선 지휘관을 넘어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집트 원정에서도 여러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싸워 명성을 높였고, 드세 장군은 그를 "용사 중의 용사"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후 뮈라 장군과 베시에르 여단장이 예산 문제를 빌미로 그를 축출하려 했으나, 오제로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12]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1801년 포르투갈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잠시 중앙에서 멀어졌다.[6][12]
사생활에서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후,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에게 구혼했으나 뮈라에게 밀렸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중재로 아름답고 총명한 루이즈 앙투아네트 게헤뇩과 재혼했다.
1804년 파리 근교의 메종 샤토를 매입했으며, 같은 해 프랑스 제1제정이 수립되자 나폴레옹에 의해 창설된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3] 1805년에는 나폴레옹의 총애를 완전히 회복했다.[13] [14]
이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제4차 대프랑스 동맹, 반도 전쟁 등 주요 전쟁에 참전하여 울름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푸우투스크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군단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자알펠트 전투에서의 지휘는 오늘날 프랑스 참모대학에서 교본으로 연구될 정도이며, 프리틀란트 전투에서의 선봉대 지휘는 더욱 두드러졌다.
1807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으로부터 할양받은 영토에 시에비에르츠 공국을 재창설하여 란에게 하사했다. 1808년에는 스페인 전선에서 투델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몽테벨로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09년에는 사라고사를 함락시키는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다.
1809년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원정에 다시 선봉으로 참전하여 에크뮐 전투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5월 22일 아스펜-에슬링 전투에서 다뉴브 강 도하 작전 중 포탄에 맞아 양쪽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9일 후인 5월 31일 빈 근교에서 사망했다.
5. 1. 제3차 대프랑스 동맹 (1805)
나폴레옹의 즉위 이후 프랑스 원수가 된 장 란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도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그가 지휘하는 제5군단은 대육군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다.1805년 10월에는 울름 전투에 참가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1805년 12월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대육군의 좌익 사령관을 맡아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18]
이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란은 동료 원수인 네이와 함께 뮈라의 지휘 아래 편성되었는데, 이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서로 공을 세우기 위해 경쟁하듯 활약했다.[18] 란은 주로 선봉에 서서 적군의 진격을 막거나 거점을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다양한 병과를 효과적으로 연계하여 전투를 지휘하는 데 능숙했다.
5. 2. 제4차 대프랑스 동맹 (1806-1807)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어지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제4차 대프랑스 동맹)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동료 원수인 뮈라와의 불화는 여전하여, 서로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다.[18] 1806년 12월 26일 폴란드에서 벌어진 푸우투스크 전투와 1807년 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랑은 주로 선봉으로서 적군의 저지나 거점 공략 임무를 자주 맡았고, 각 병과를 효과적으로 연계하여 전투를 지휘하는 데 능숙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18]5. 3. 반도 전쟁 (1808-1809)
1808년, 랑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스페인 전선으로 파견되어 독립된 군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먼저 스페인 야전군을 격파했는데, 특히 1808년 11월 22일 투델라 전투에서는 프란시스코 카스타뇨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이후 1809년 1월부터 시작된 사라고사 포위 공격을 지휘하게 되었다. 2월 20일, 랑은 치열하고 고된 전투 끝에 마침내 사라고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전선의 비참함과 전투의 참혹함에 마음 아파하며 점차 전쟁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라고사 함락 후, 랑은 쉬셰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6. 죽음
스페인 원정에서 1809년 2월 20일 사라고사를 함락시킨 후, 랑은 오스트리아 원정에 참가했다. 5월 22일,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틀째, 전투가 한창일 때 랑은 도랑가에 앉아 친구인 피에르 샤를 푸제 장군과 대화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포탄이 날아와 푸제 장군을 참수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직후, 엔체르스도르프에서 발사된 두 번째 포탄이 그의 꼬았던 다리에 명중했다. 이 포격으로 한쪽 무릎뼈가 산산조각 나고 다른 쪽 다리의 힘줄이 찢어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랑은 "내가 부상을 입었네. 별것 아닐세.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게"라고 말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즉시 후방의 응급 치료소('테트 드 퐁')로 옮겨졌고, 수석 외과의였던 도미니크 장 라리가 2분 만에 그의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랑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용감하게 견뎌냈다. 수술이 끝나자 나폴레옹이 다가와 들것 옆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랑 원수를 껴안았다.
다음 날인 5월 23일, 그는 배로 비엔나 짐머링 구의 일부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있는 최고급 저택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상처가 감염되어 악화되었고, 8일 후인 5월 31일 새벽, 결국 부상으로 사망했다. 나폴레옹은 랑의 죽음에 대해 "나는 내 군대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자, 16년 동안 나와 함께 싸운 동료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 말하며 깊이 애도했다. 랑은 나폴레옹 전쟁 중 전사한 최초의 제국 원수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 파리 앵발리드에 매장되었으나, 1810년에 발굴되어 장엄한 의식을 거쳐 팡테옹에 다시 안장되었다.
7. 가족 관계
(Paulette Méric프랑스어)
(1795년 결혼, 1800년 이혼)
(Jean-Claude Lannes de Montebello프랑스어)
(Louise Antoinette Guéhéneuc프랑스어)
(1800년 결혼)
(Louis Napoléon Lannes프랑스어)
(Alfred-Jean Lannes de Montebello프랑스어)
(Jean-Ernest Lannes de Montebello프랑스어)
(Gustave-Olivier Lannes de Montebello프랑스어)
(Josephine-Louise Lannes de Montebello프랑스어)